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의 일요일 사건 (문단 편집) === 러일전쟁으로 인한 국내 상황의 변화 ===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 정부는 러시아 안팎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해 거금을 지원해주면서 러시아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확장코자 했다. 이를 위해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긴 주러 일본공사관을 거점으로 하여 '러시아 내란 공작'을 실행, 국내외의 여러 거물 혁명가, 좌익 운동가, 불평분자등과 접촉해 그들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해주었다.[* 일본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가폰 신부나 공산주의 사상가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아나키즘]] 사상가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폴란드]](당시 [[프리비슬린스키]]) 민족주의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핀란드]](당시 [[핀란드 대공국]]) 독립운동가 실리아쿠스, 소설가 [[막심 고리키]], 그루지야(조지아)·라트비아·벨로루시 등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의 민족주의 지도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일본의 지원을 시작으로 세력을 일군 이들은 정치적으로든 아니면 개인적인 대의를 품어서든 일본의 목적대로 러시아 내에서 공화주의와 노동자를 위시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한다.[[http://www.startup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620|#]] [[https://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86|#]] 또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성향을 막론하고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은 대게 1861년의 농노제 폐지로 타격을 입은 몰락귀족, 하급귀족들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한 숫자의 노동자들도 있었다.[* 노동자라 해도 고급기술직, 중간관리직은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들이며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다. 즉 애시당초 혁명을 주도하는 건 귀족이었다.]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귀족, 인텔리겐치아, 학생,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정치 세력이 부상하면서 러일전쟁에서의 열세로 권위가 떨어지고 있는 차르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1904년 8월 자유주의적 성향의 표트르 스뱌토폴크미르스키에게 내무장관직을 주고 귀족들에게 약간의 양보를 할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인텔리겐치아 집단인 해방 연합(Союз освобождения)의 주도로 11월 젬스트보 활동가 총회가 소집되어 선출식 대의제의 도입을 차르에게 요구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또한 이와 연계해서 34개 도시에서 좀 더 작은 규모의 회의가 소집되었고 같은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비슷한 내 같은 달 말에 모스크바 귀족원에서도 선출 대의제를 요구하라는 내용의 비슷한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귀족들의 정치 공세에 맞닥뜨린 니콜라이 2세는 모스크바 귀족원장 표트르 트루베츠코이 공작에게 "농민은 헌법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차르의 손이 묶였다는 것은 이해할 겁니다"고 전제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혁명의 위험을 증대시킨다고 경고했다. 또한 러시아 육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도 트루베츠코이 공작에게 "만약 모스크바인들이 적을 빠르게 무찌르기 위해 자신들의 훌륭한 아들들을 보내기를 원치 않는다면, 최소한 우리가 만주 들판에서 승리의 끝까지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항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